내 몸 읽어 보기-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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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의 포스터에서 비올레타의 뒷모습은
갸날프지만 아름다운 미의 여신, 비너스를 연상시킵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참 말이 많은 오페라입니다. 비올레타가 미모와 병약함이라는, 전형적인 순정만화 퓔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소프라노 하면 떠오르는 풍만한 몸과 매치되기 힘들죠. 그래서 「라 트라비아타」 주연을 맡고, 사람들에게 좋은 공연이었다고 칭찬받으려면 출중한 노래 실력만 가지고는 택도 없습니다~ 병약한 인물에 맞게 몸도 꽤나 앙상해야 합니다. 좋은 노래를 부르면서 몸도 앙상한 소프라노를 요구하는 이런 태도는 비올레타 캐스팅을 언제나 시각적 폭력이라는 말로 귀결되게 만듭니다.

비올레타 캐스팅 논란이 뭐 오페라 세계만의 일이겠습니까~ 저 역시도 한때 누군가 제 몸을 시각적 폭력이라 여기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이 언니~’에서 멋진 척 글을 쓰고 있는 저도, 한때는 다이어트에 목숨 걸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굶는 건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어서 굶어 본 적은 없지만, 그만큼 먹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었습니다. 식빵에 버터 한 번 발라도 ‘살찔 텐데..’, 치즈가 잔뜩 녹아 있는 피자를 들어 올리면서도 ‘살찔 텐데’, 심한 날은 하루 종일 살찔 텐데만 생각하다가 지나간 적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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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피카소 作 <거울 앞의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과 거울 속 여인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타인(남성)의 시선으로 제 모습을 보게 하는 건 아닐까요.


한때 저에게 ‘건강하다’라는 말은 뚱뚱하다의 완곡한 표현처럼 들렸습니다. ‘지금이 딱 좋다’라는 말은 저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죠. ‘날씬하다’라는 말도 부족하게 들렸습니다. ‘너 너무 말랐어, 앙상해~’나 되어야 이제 만족하고 살 수 있겠군 싶었죠. 이것뿐인가요? 전 가끔 거울이 이전투구의 장(場)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몸은 분명 제 몸이지만, 거울 속엔 저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은 누구처럼, 배는 누구처럼, 다리는 누구처럼 이러면서 온갖 익명의 누군가가 제 몸 위로 겹쳐지면서 자꾸만 실제의 제 몸을 밀어냈습니다. 그 몸들의 겹침 속에서 만족을 느껴 본 적은 없습니다. 거울 속의 몸은 분명 미디어나 광고가 표준처럼 제시하는 몸과 같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 좌절감과 결핍감이 밀려오죠. 그 외부의 몸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알지만, 아무리 주위에서 괜찮다고 하지만, 몸에 관해서는 만족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어쨌든 말입니다. 제 몸에 관해 요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던 저에게 친구가 책 한 권을 주더군요.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라는 다소 신비스러운 제목을 풍기는 여성 건강 해설서(도움서)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성의 몸을 주제로 한 책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뭐 몇 권 있다 하더라도 여성을 거의 아기 낳는 도구 정도로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건강한 몸을 만들 것인가 같은 말이나 하는 책이 대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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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_
여성의 몸에 대한 미의 기준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부장적 사회가 원하는 대로 규정 지어졌습니다.
요즘엔 여성의 식욕이 유일하게 인정되는 임신 기간마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 언니는 가부장적 사회가 원하는 몸 이미지는 고만 버리라고 말합니다(전 사실 뜨끔~ 했슴따). 그리고 제발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약 먹고, 병원 가서 치료하란 이야기도 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의사인데도, 의학적 치료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말도 합니다. 모든 것이 성인 남성 기준으로(심지어 알약들까지) 재편되어 있는, 그런 젠더화된 의학 세계에서 여성의 몸을 살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언니 차분하게 저도 잘 모르는 여성의 몸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많은 여성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건 자신의 몸에 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제 몸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체중계에 나타나는 수치나 여성복 사이즈가 유일하게 제 몸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죠. 내 몸이 주는 신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병원에 가면 불규칙한 월경은 몇 달 있다 보면 나아지는 거라고 하고, 월경통에 대해선 아직도 진통제가 유일한 처방이죠. 이유 없이 아플 때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의사의 ‘아무 이상 없음’이라는 말은 늘상 저를 좌절하게 만들었죠.

어쨌거나, 위궤양이 재발하여 힘든 한때를 보내게 된 요즘~ 저는 이 크리스티안 언니를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전엔 그저 신기해서 아하~ 몸이란 요렇게 신기한 거구나 하고 읽었다면, 지금은 언니의 지시대로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자연 치유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자연 치유라고 해서 별 거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주말마다 산에 다니고, 평일엔 한강 공원까지 열심히 걷는 거죠. 언니 말대로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몸(나른하고, 갸날프고, 연약하고, 한마디로 뭐 하나 움직이기 힘든 몸)하고는 이제 안녕~ 그런 몸에서 벗어나서 다른 몸으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죠. 게다가 전투판이었던 거울은 그저, 어디 아픈 데 없나를 체크하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바뀌고 있는 이 몸이 어디까지 변화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결과를 맺을지도 사실 예상하기 힘들죠. 열심히 걷고, 운동하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이런 일로 몸이 달라지면, 삶이 변한다는데 한번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by 없음 | 2008/11/04 17:24 | 이언니를만나다 | 트랙백 | 덧글(2)

삼겹살 커넥션으로 이루어진 세상-육식의 종말

비육식의 비애

얼마 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때문에 나라가 시끌시끌했었죠~. 아이들 먹거리 걱정에 나오신 아주머니, 학생들뿐만 아니라, 광우병 소고기 수입으로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 때문에 나온 분들도 많았죠. 저도 종종 나가서 촛불을 들긴 했습니다만~ 전 사실 제가 먹는 소고기에 불만이 있어서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뭐랄까..전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말은 ‘김치를 먹지 않는다’, ‘가지를 먹지 않는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상하게도 선택적으로 야채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에 대해선 다들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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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_일러스트 잠산
광우병 파동 이후 정치적으로 비육식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고기'를 먹지 안 먹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사실 궁금했습니다. 내가 불편해서 안 먹겠다는데, 어디 가서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할 때마다 왜 이상한 시선을 받아야 할까? 나름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고기를 안 먹긴 하지만, 나 한 명이 안 먹어서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등등 가축들이 덜 죽을 텐데, 왜 사람들이 요러는 걸까? 나 좋은 일 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제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고기로 맺어진, 아니 고기 없이 흘러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고기를 안 먹는다라고 선언하는 건, 자진하여 왕따를 선언하는 것과 같았으니까요.

범위를 넓혀 ‘축산업과 한국 사회의 상관관계’ 따위를 분석할 맘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해 보고 싶군뇨. 우선 우리가 친구들을 만난다고 생각해 봅시다. 굳이 친구가 아니더라도, 모임을 갖는다고 생각해 보자구요. 만나서 어디로 갈까요? 저녁을 먹거나 아니면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던가 하겠죠. 아시겠지만 저녁을 먹든, 술을 먹든 다들 고깃집으로 갑니다. 아닌 것 같다구요? 편하게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도 고기와 만나게 되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한다고 해도 고기죠. 스파게티나 이런 거 먹으면, 고기 먹는 거 아니라구요? 진짜 그럴까요? 스파게티 같은 양식들~. 고기가 없다고 우기시겠지만, 그 많은 스파게티 소스들의 베이스는 ‘치킨 스톡’이라는 닭 육수로 만들어집니다. 많은 아토피 환자들이 고기가 빠진 스파게티를 먹고 온 날, 가려움에 시달리는 이유는 바로 ‘치킨 스톡’ 때문이죠.

무슨 인간관계들은 다 남의 살 뜯으면서 이루어지는지, 제가 살고 있는(이사왔음따~) 이 홍대 부근의 많은 고깃집들은 일주일 내내 호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고기를 먹으면서 친분을 다지고 있죠. ‘삼겹살 커넥션’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인간관계는 고기가 빠진다면 아마도 길을 잃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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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과 자장에 함유된 돈지(돼지고기)는 물론, 심지어 '두유'에도 돼지에서 나오는 젤라틴이 들어있습니다 !


자 그럼 친구들 만나는 것만 줄이면, 고기 커넥션에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깥에서 밥만 안 먹으면, 친구들 만나고 싶을 때 집으로 불러서 먹으면 되지 않을까 했었죠. 하지만 마트에 장을 보러 가보시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어쩌다 요리하기가 귀찮아 ‘라면’을 사려고 보면, 모두 육수가 베이스입니다. 물론 성분 함량표를 살펴 보지 않는다면 절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글씨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라면은 그렇다 하더라도, 육수가 필요 없을 것 같은 떡볶이 소스, 심지어는 쫄면 소스에도 육수는 마치 ‘고향의 맛’인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정말 편안하게 사는 삶(요리하지 않고 손 쉽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의 삶)은 고기를 매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두가 육수로 만들어져 있더라구요.

자 이쯤 되면 한국 사회에서 온전하게 ‘비육식’으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되죠. 편하게 먹어 보려고 인스턴트 식품을 손에 쥐면, 그 자리에 서서 성분 함량표 제일 작은 글씨까지 뜯어 봐야 할 테니까요. 그 모든 시간을 써서 다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먹을 만한 음식이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그럼 과자나 먹어 보자 하며, 제 일용할 식량 ‘오X오’나 초코XX를 뒤적 거립니다. 아시겠지만, 초코XX의 마쉬멜로우는 돼지에서 나오는 젤라틴으로 만들어져 있고, ‘오X오’는 이미 멜라민 함량 식품으로 식약청에서 공표됐죠. 식품을 구하러 간 마트도 결코 고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다가 안 되는 요리 실력으로 뭐든 만들어 먹어야죠.

사실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육식을 벗어나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 ‘비육식’을 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저도, 가끔 도대체 이 불편함을 얼마나 지속해야 할지 고민도 됩니다. 바쁜 아침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먹기 위해 밥 준비를 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런 건 알고 있죠. 우리가 원하는 것들, 소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들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돈 내고, 내가 쓴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 돈은 어떤 맥락에서 벌게 된 것이고, 어디서 온 것일까요? 내가 지불하는 그 순간 그 돈은 어떻게 흘러가서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일까요? 요런 생각까지 미친다면, 우리의 욕망은 많은 결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결들 사이엔 사회적인 권력관계들이 얽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기 소비’ 역시 축산업 진흥하고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그 많은 고기들을 충당하기 위해, 가축들은 마구잡이로 도살되고, 어쨌든 빨리 키워서 도살해야 하니, 뭐든 먹여 몸집만 키우는 방식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넓게 본다면, 우리는 가축들이 그렇게 고기가 되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체하며 영양분을 얻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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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作 <고기와 형상>

우리가 소비하는 '고기'에는 많은 욕망들이 얽혀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우리의 욕망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돈(자본)'과 '권력'의 욕망.
이 욕망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때,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지 않을까요?

헉! 쓰다 보니 멀리까지 와버렸군요. 오늘 ‘언니’도 없고, 글도 뭔가 캠페인스럽네요. 앞서 말씀드렸듯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건 정말 불편합니다. 술 마시러 갈 때나 밥 먹으러 걸 때, 사람들이 저를 걸림돌처럼 여긴다는 거, 저도 잘 느끼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신경쓰지 않으면 무심결에 마쉬멜로우가 들어간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맛나게 씹고 있을 때도 있죠. 그래서 가끔 생각합니다. 정말 모두가 알고 있긴 하지만, 아는 만큼 모두 실천하고 산다는 게 정말 사회 속에서 가능한 일일까? 이쯤 되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들어가지 않고서는 제가 생각하는 가치들을 말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혼자만 살아갈 수도,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가치들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포기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착한 일 한 가지씩 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제가 고기 안 먹는다고 당장 도살장이 없어지거나, 사료에 영양강화제나 항생제가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아니겠죠.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순 없지 않겠어요? 불편하지만, 요리 솜씨 느는 셈 치고, 고기 없이 친구들과 노는 법을 배우는 셈 치고~ 재미나게 사는 거죠~.

by 없음 | 2008/10/28 14:48 | 이언니를만나다 | 트랙백 | 덧글(0)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내 사표는 의미있다

지난주에 포스팅 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2편입니다.


유치한 권력

앤드리아는 경쟁률 무지하게 치열하다는 패션잡지, 『런웨이』어시스턴트 에디터로 들어갑니다. 냄새 풍기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양파 베이글을 사람들 앞에서 우적우적 씹어 대고, 회사에서 트림하는 것도 잊지 않는 이 무(無) 센스녀를 과연 누가 채용해 주겠습니까~ 44사이즈만 살아남는다는 그곳에서 77사이즈로 들이대는데 과연 누가 뽑아 주겠냐구요. 하지만 바싹 마르고, 패션밖에 모르는 애들보다 좀 똑똑한 애가 있었으면 하는 미란다의 작은 바람 덕택에 앤드리아는 즉석에서 채용됩니다.

어시스턴트 에디터, 미란다 직속 비서라는 이 자리는 뭘 하는 곳일까요? 영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란다는 날마다 자신의 코트와 가방을 앤드리아 자리에 집어 던집니다. 정리하라구요~. 네 정리, 비싼 옷들 구겨질까 봐 열심히 정리합니다. 그것만 시키나요. 폭풍우 치는 날, 쌍둥이 공연 봐야 하니 비행기 띄우라고 전화를 하지 않나. 아직 출간되지 않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구해 오라고 하질 않나~. 영화 속에서 앤드리아는 말이 비서지, 사실은 유모(nanny)와 다름없는 역할을 합니다. 누구의 유모냐구요? 당연히 미란다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중에서.
미란다(매릴 스트립)의 비서 앤드리아(앤 해서웨이)는 '유모' 역할을 합니다.
사실 비서나 유모나 누군가의 '수족' 역할을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말입니다.


본인 역시도 일과 가정 모든 곳에서 가부장적 성 역할을 강요받고 괴로워했으면서, 결국 어시스턴트 에디터인 앤드리아에게도 똑같은 일을 시킵니다. 먹고 싶은 스테이크 사오라고 해놓고는 다른 약속 잡고, 변덕은 어찌나 심한지. 완전히 애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죠. 앤드리아는 그런 미란다의 애 같은 행동을 다 받아 줘야 하죠. 재미나지 않습니까? 악착같이 올라간 자리에서 미란다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자기보다 직급 낮은 애들 등골이나 빨고, 제멋대로인 행동들 받아달라고 하는 것밖에 없죠. 미란다는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겪어 왔으면서도(물론 제 생각에) 전혀 그 고리를 끊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하면 더했지요.

누군가의 말대로, 사람의 본성이란 권력을 잡았을 때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원래 권력이라는 게 저렇게 유치한가 싶기도 하더군요. 고군분투해서 올라간 곳에서 하는 일이 결국은 상황에 제약받지 않고 부하 직원에게 제멋대로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한껏 해보려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길 원하는 것일까요? 더 당당하게 유치해지기 위해서?


나의 성공은 누군가의 추락

열심히 둘이서 아웅다웅, 동거동락하다 보니 미란다도 서서히 앤드리아를 신뢰하는 눈치입니다. 그러면서 원래 예정되어 있던 파리 패션쇼에 앤드리아 선배 에밀리 대신에 앤드리아와 가려고 하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멋진 사람들과 아름다운 옷, 조금씩 쌓여 가는 미란다의 신뢰로 일이 즐거워진 앤드리아, 몇 초 고민하다가 결국 에밀리에게 자신이 가게 되었다고 말하죠.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요.

앤드리아가 에밀리에게 어쩔 수 없이 파리 패션쇼에 내가 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앤지도 사람들에게 말하죠. 어쩔 수 없이라구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구요. 표면적인 층위에서 이들이 누군가를 밀어 내고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하는 핑계들은 똑같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죠.

앵그르 作 <오달리스크와 노예>
누워있는 주인과 옆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화면 뒤쪽에 선 남자.
주인과의 거리에 따라 역할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과연 그 역할의 가치도 '거리'에 의해 규정될까요?


에밀리라는 퍼스트 어시스턴트를 밀어낸 앤드리아는 더 이상 미란다의 내니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미란다의 내니는 다시 에밀리에게 미뤄지죠. 능력을 인정받은 앤드리아는 더 이상 딸처럼, 엄마처럼 미란다를 보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보살핌의 가치는 그렇게 하찮은 것인지 바로 중요한 일에서 밀려난 에밀리에게 넘어가거든요.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어쩌겠습니다. 상사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행복한 일이지요.

하지만 미란다는 자기 수족처럼 부리던 나이젤이란 남자를 마치 더 키워 줄 것처럼 하더니 자신의 위치가 불안정해지자 가차없이 그의 성공에 초칠을 해버립니다. 그러고는 독립시켜 주기로 한 약속을 깨버리고, 다시 자신의 밑으로 끌어옵니다. 순전히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면서 앤드리아에게 너와 나는 닮았다고 하죠.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나 당당하게 그것을 이룬다구요. 나이젤을 그렇게 처참하게 만들어 버린 미란다에게 나와 당신은 같지 않다고 말했을 때, 미란다가 말하죠.

“너도 에밀리를 그렇게 밀어냈잖아.”



그녀의 사표는 의미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앤드리아는 미란다의 그 냉혹한 이야기 ‘내가 나이젤 밀어냈다고 뭐라 하지마, 너도 에밀리 밀어냈잖아’를 들으며 그 자리에서 내려 사표를 던집니다. 그리곤 미란다의 노예 콜링을 전담했던 휴대폰을 바로 던져 버립니다. 다시는 당신의 지시를 받고 살지 않겠다는 표시인 거죠~. 앤드리아는 뭘 느꼈을까요? 가만히 있으면, 퍼스트 어시스턴트 에디터로 승진하고, 누구보다 미란다는 패션의 여왕 옆에서 온갖 감각을 전수받고, 글도 잘 쓰니 몇 년 더 하다 보면 글이라도 연재하기 될지 모르는 데 말입니다. 좀만 더 버티면 칼 라거펠트 같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앤드리아에게 옷 한 번 입혀 보려고 기를 쓸 텐데~.

미란다 밑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끝까지 갔다면 앤드리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전제 하에서, 딱 미란다 만큼의 부와 명예 권력을 얻었을 겁니다.
더불어 그의 탐욕과 야비함도 물려받았겠죠. '현실'은 늘 이런식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삶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시 가서 미란다의 변덕을 받아주는 일은 뭐 더 이상 힘든 것도 아닐 겁니다. 조금만 견디면 되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앤드리아는 그곳에서 사람을 마치 코 푸는 화장지 사용하듯 쓰고 버리는 미란다에게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행동에 전혀 죄책감이나 미안함 따위는 갖지 않고, 이게 현실이니까. 이렇게 해서 다들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거야~ 뭐 이런 멘트로 대충 포장하는..착취와 착취로만 이어지는 연쇄 고리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이렇게 챙기지만, 곧 나이젤처럼 버려질 수도 있죠. 이런 불안감 때문만이었다면 앤드리아는 오히려 악착같이 거기서 버텨냈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은 신체 사이즈에 따라 평가받고, 조금이라도 감각이 무뎌졌다고 하면 바로 버려지는 세계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람들을 잘라 내야 하고, 그 자리를 내가 메꿔야 하죠. 직장은 자아 실현의 장소라면서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었던 앤드리아는 차마 그 꼴을 못 봤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앤드리아가 상을 받았던 글은 자신이 살던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에 대한 고발 기사였거든요.  

얼마 전 어떤 기사를 읽었습니다. 20대 여자들은 왜 이렇게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빨리 사표를 내냐 뭐 이런 기사였습니다. 그런 진단에 너무나 익숙한 문구들이 함께 배치되어 있더군요. “조직 생활을 안 해봐서, 군대를 안 가 봐서, 어려운 시절을 겪어 보지 않아서.”

Economy21 2007년 기사 발췌(바로가기)
연차별 이직 현황입니다. 직장생활을 30세부터 한다고 쳐도, 마흔 이전에 저마다 이직을 합니다.
이리저리 바꾸는 가운데 가려지지 않는 '현실'은 늘 고개를 비집고 나옵니다.


1%는 수긍했고, 나머지 99%엔 분노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저런 현상은 20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요. 누구나 부러워하는 S사에 다니던 제 친구(남자입니다)도 1년만 다니고 바로 그만뒀으며(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하면서요). 그 회사에 어렵게 들어간 신입 직원의 편지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했었죠. 뭐 워낙 기사에서 20대 여성만 콕 찝어 맞춰서리 사실 억울한 맘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여자가 그만 두는 거 카운트로 세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전 그와 동시에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자들이 사표 쓰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선배들의 글도 읽었습니다. 또한 그 옆에는 사표 쓰는 여성들이 선배에 대해 항변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선배들에게 말을 해도, 네가 참아라 세상이 다 이렇다, 이런 말만 한다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선배들 이야기가 사실 백 번 맞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선배들의 이야기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잘 참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미란다처럼 거대한 착취 고리 속에서 상위 고리로 올라가는 것 말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 사실 수많은 앤드리아들이 원하는 건 자유로운 세계가 아니라 더 나은 세계이고, 자유로운 세계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일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앤드리아는 지독하게 변하지 않는 이 세계,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세계만 좋은 세계, 성공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먹이 사슬의 상위 단계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세상. 저에게 앤드리아의 사표는 더 이상 그 착취의 사슬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현실이라는 말이 알고 보면 그들의 변하지 않는 보수성을 아름답게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버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렇다고 앤드리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표를 날리라는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 안에서 ‘현실’이라고 표현되는 그 많은 말들이 가리고 있는 걸 젊은 20대들은 명민하게 알아채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현실이 이래서, 성공하면 너도 나처럼 뭐 이런 멘트로는 20대의 이탈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by 없음 | 2008/10/14 13:52 | 이언니를만나다 | 트랙백 | 덧글(3)

여이연 강좌

목요강좌 정체성 읽기

 

교재: Identity: a reader(Paul du Gay, Jessica Evans, and Peter Redman SAGE Publication)

책임강사: 박이은실

 

강사소개: 말레이시아 국립대 국제학 및 말레이시아학 연구원에서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월경이 어떤 페미니스트 정치학적 위치를 가지는지에 관한 논문으로 사회학 석사를 받고 현재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에서 젠더와 계급, 섹슈얼리티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상호구성되어 왔는지를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성노동세미나, 섹슈얼리티세미나를 함께 해오고 있다.

 

특강 : 박미선, 이현재(여성문화이론연구소)

 

강좌소개 : 매주 목요일 7시

수많은 정체성들이 넘쳐나며 서로의 존재성을 외치게 되었으면서도 다양한 정체성들을 획일적으로 호명해버리고 싶은 폭력적 욕망도 함께 혼재하는 오늘날, 여성운동, 민족해방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게이/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간성인 해방운동’ 등과 여성주의, 문화연구, 게이/레즈비언 연구, 퀴어이론 등의 학문 영역에 관계하고 있거나 여기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정체성’이란 주제는 반드시 따박따박 짚고 가야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본 강좌는 이와 같은 고민이 역력히 읽혀지는 책 [정체성 읽기 (Identity: a reader)]을 하나의 참고서로 삼아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읽어나가면서 이 고민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정체성 읽기]는 폴 두 게이, 제시카 에반스, 피터 뢰드맨 등이 함께 편집해 엮은 책으로 스튜어트 홀, 루이스 알튀세르, 자끄 라깡, 제클린 로즈, 줄리아 크리스테바, 자끄 데리다, 호미 바바, 미셸 푸코, 주디스 버틀러, 프란츠 파농, 제시카 벤자민, 안소니 기든스, 피에르 부르디외, 니콜라스 로즈, 마셀 마우스, 막스 베버 등 쟁쟁한 선배 학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 자리에 불러 놓았다. 따라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이고도 심층적인 질문을 위한 좋은 입문서이자 훌륭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본 강좌는 이 책과 함께 한국사회 맥락에서의 고민을 모으고 심화시키는 시간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 강좌를 위한 번역본은 각각 해당강좌 일주일 전마다 한 장(chapter)씩 미리 나갑니다.)

 

강좌일정:

1부: 언어, 이데올로기 그리고 담론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The subject of language, ideology and discourse)

1주 누가 ‘정체성’을 필요로 하는가? / 스튜어트 홀

(Who needs 'identity'? / Stuart Hall)

2주 이데올로기가 주체로서의 개인에게 질의를 하다 / 루이스 알튀세르

(Ideology interpellates individuals as subjects / Louis Althusser)

3주 언어에서의 주체성 / 에밀 방브니스트

(Subjectivity in language / Emile Benveniste)

4주 거울단계 / 자크 라깡

(The mirror stage / Jacques Lacan)

5주 여성적 섹슈얼리티 / 재클린 로즈

(Feminine sexuality / Jacqueline Rose)

6주 시적 언어에서의 혁명 / 줄리아 크리스테바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 Julia Kristeva)

7주 봉합: 영화예술 모델 / 카자 실버맨

(Suture: the cinematic model / Kaja Silverman)

8주 차연 / 자크 데리다

(Différance / Jacques Derrida)

9주 정체성 캐묻기: 탈식민적 특권 / 호미 바바

(Interrogating identity: The post Colonial Prerogative / Homi K. Bhabha)

10주 영역계 / 미셸 푸코

(Domain / Michel Foucault)

11주 퀴어일 수 밖에 없는 / 주디스 버틀러

(Critically queer / Judith Butler)

일정: 2008년 10월 9일-12월 18일 매주 목요일 7시

수강료: 16만원

 

2부: 정신분석과 심리사회적 관계

(Psychoanalysis and psychosocial relations)

12주 정신분열 체계에 대한 몇 가지 주석 / 멜라니 클레인

(Notes on some schizoid mechanisms / Melanie Klein)

13주 아동발달기에 있어 거울로서의 어머니와 가족의 역할 / 도널드 위니콧

(Mirror-role of mother and family in child development / D. W. Winnicott)

14주 변이적 대상과 변이적 현상 / 도널드 위니콧

(Transitional objects and transitional phenomena)

15주 불안에 대한 방어로서의 사회체계 / 이사벨 멘지스 리트

(Social systems as a defence against anxiety)

16주 정신분석, 인종주의, 반인종차별주의 / 마이클 뤄스틴

(Psychoanalysis, racism and anti-racism / Michael Rustin)

17주 흑인과 정신병리학 / 프란츠 파농

(The negro and psychopathology / Frantz Fanon)

18주 우리시대의 나르시스적 인성 / 크리스토퍼 래쉬

(The narcissistic personality of our time / Christopher Lasch)

19주 오이푸스콤플렉스의 난제 / 제시카 벤자민

(The oedipal riddle / Jessica Benjamin)

20주 자아의 궤적 / 안소니 기든스

(The trajectory of the self / Anthony Giddens)

21주 애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 이안 크라입

(What's happening to mourning? / Ian Craib)

일정: 2009년 2월 5일-4월 9일 매주 목요일 7시

수강료: 15만원

 

3부: 정체성, 사회학, 역사

22주 호모 클로수스와 문명화 과정 / 노버트 엘리아스

(Homo clausus and the civilizing process / Nobert Elias)

23주 일대기적 환상 / 삐에르 부르디외

(The biological illusion / Pierre Bourdieu)

24주 ‘지위’에 대한 주석 / 토마스 험프리 마샬

(A note on 'status' / Thomas Humphrey Marshall)

25주 정체성, 계보학, 역사 / 니콜라스 로즈

(Identity, Genealogy, History / Nikolas Rose)

26주 인간 정신의 범주: ‘인간 개인’이라는 개념과 ‘자아’라는 개념 / 마르셀 모스

(A category of the human mind: the notion of 'person'; the notion of 'self' / Marcel Mauss)

27주 정치학이라는 전문직과 직업 / 막스 베버

(The profession and vocation of politics / Max Weber)

28주 ‘쾌락의 활용’에 대한 입문 / 미셸 푸코

(Introduction to 'The use of Pleasure' / Michel Foucault)

29주 ‘자아 양성’이라는 관념에 대한 성찰 / 삐에르 하도트

(Reflections on the idea of 'the cultivation of the self' / Pierre Hadot)

30주 인격과 가면적 인격 / 아멜리에 오켄스버그 로티

(Persons and personae / Amélie Okensberg Rorty)

일정: 2009년 6월 4일-7월 30일 매주 목요일 7시

수강료: 14만원

 

 

 

※ 여이연 지독(至毒독하게 읽기 /遲讀더디게 읽기/知讀알며 읽기)강좌 참고사항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홈페이지 ‘강좌신청 게시판’에 신청하신 후 아래 계좌로 입금하시거나 여이연으로 전화주세요.

 

- 수강료 : 전체 수강 또는 각 분기별로 수강 가능합니다.

⁍ 화요강좌 자본론 읽기

통강 40만원/각 강좌당은 9만원

 

⁍ 목요강좌 정체성 읽기

통강 40만원/ 1부 16만원, 2부 15만원, 3부 14만원

 

* 카드결제 가능(신청강좌와 성함, 연락처를 알려주시고 강좌 당일에 결제하시면 됩니다)

- 입금계좌 : 국민은행 411401-01-184386 예금주 (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 강좌장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 강좌신청마감 : 각 강좌 전일까지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02) 765-2825

- 홈페이지 www.gofeminist.org (강좌신청게시판)

- 이메일 gynotopia@gofeminist.org

* 여성문화이론연구소는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에서 50미터 정도 나와, 왼쪽 T WORLD 건물 5층(밖에서 보면 4층 건물임)에 있습니다. 간판이 없으니 유의하세요. 자세한 위치는 홈페이지 약도(오시는길)를 참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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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정체성 읽기 강좌를 듣기로 했다.

 

남편이 언어 쪽에 관심이 많아 함께 듣자고 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영어 해석을 좀 도움받고자 ㅋㅋ

 

글고 분명 혼자 들으러 가면 빠지려고 온갖 용을 쓸 것 같아서.

 

자본 강좌도 함께 듣고 싶은데, 금요일날 현상학 강의가 있어 다 듣기 힘들 것 같다.

 

화요일 날 별 일 없으면 '이 언니를 만나다' 한 꼭지 써야 하고, 목요일날 강좌 듣고, 금욜날은

 

현상학 듣고, 일욜날은 꼼짝없이 앉아서 목욜 강좌 텍스트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자본까지 들으면
겨울 내내 한약 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요새 체력이 넘쳐난다지만..다 듣긴 좀~

 

by 없음 | 2008/10/01 15:41 | 이언니를만나다 | 트랙백 | 덧글(0)

결점포장금지-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인간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머리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며, 몸은 갑자기 살이 찐 것인지 흉해 보이고, 남들과 비교해서 하나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날. 사실 저런 날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마저 나 모르게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전 저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들을 노트에 다 적습니다. 물론 반대편에 장점(강점) 뭐 이런 항목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손이 그쪽에 가서 뭔가를 적는 경우는 거의 없죠. 단점(약점) 이 부분은 앞장만으로는 모자라 뒷장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구요. 그래서 제 이십대 초반의 목표는 단점 리스트에 적혀진 것들을 삭제하기였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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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作 『삶을 위한 예술』
머리만 커져버린 '예술'처럼 우리 삶도 끊임없는 계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의식 속으로 도주하거나, 완벽하게 '그'의 시선에 맞춰서 살거나,
이 두가지 외의 선택지는 무엇일까요?

덕분에 운전 면허증도 따고, 학사 경고로 펑크난 교양 필수 수업 학점도 다 채워 넣어서 졸업도 했지요. 성적도 좋아졌고, 제법 친한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살 뺀다고 바깥에서 운동하는 시간이 늘어나서 그런지 나중엔 이십대답지 않은 권태감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좋았죠. 문제는 그 단점 리스트라는 게 무슨 박테리아 분열을 하는지, 삭제하는 만큼 늘어나고 또 늘어나고, 나중엔 일상이 단점으로만 채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거 참 견디기 힘든 기분이더라구요.

『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 이 책은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신다면 전 언제나 그렇듯 우연하게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레포트용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가 ‘공주’라는 말에 홀려서 빌려 온 책이었으니까요. 다소 동화스러운 표지와 등장 인물들(빅토리아 공주, 낄낄 왕자, 부엉이 박사, 말 하는 돌고래)은 별 내용 없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읽어 갈수록 이 책 안에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저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그래서 몇 페이지 안 되는 책을 읽으며 꽤 많이 울었고,(이 책 빌려 줘서 안 울었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그 당시 제가 갖고 있던 고민들이 결코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빅토리아 공주는 왕국의 공주입니다. 공주라 하면 갖고 싶은 것 다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공주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순 없습니다. 정식으로 춤을 배워 왕국에서 지정해 준 파트너와 춤을 추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무 데서나 제멋대로 춤을 춰서는 안 됩니다. 기분 좋다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때는 어린 시절로 끝입니다. 자칫하면 신하들이 공주를 우습게 볼 수 있으니까요. 어린 시절 갖고 있었던 습관을 다 버리지 못하는 빅토리아는 참 괴로워지죠. 자신이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던 시절은 이제 끝. 모든 것들은 통제 영역으로 들어가고, 자신이 갖고 있는 천성은 공주에게 걸맞지 않은 결함으로 낙인 찍혀 버리니까요.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좋겠지만, 공주는 슬픔을 표현하는 눈물도 함부로 흘리지 못하도록 통제받습니다. 자신이 울고 있을 때, 왕이나 왕비는 그녀의 아픔이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울보’라는 한마디로 그녀를 감정 컨트롤 못하는 못난 공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빅토리아 공주는 기분이 좋을 때 노래하고, 슬플 때 우는 자신을 비키라고 이름 붙이고 어두운 옷장 안에 가둬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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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의 무언가를 억압하는 순간, 억압 당하는 것과 억압 하는 것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느끼는 인격적인 고통은 대부분 이러한 '분리'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자신을 가둬 버리자, 공주는 금방 왕과 왕비가 원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요건 반쪽짜리 성장이었습니다. 공주는 이제 왕자를 만나기를 꿈꿉니다. 왕자를 만나면 자신의 모든 결점들을 여과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상상하죠. 그가 모든 것을 받아 줄 거라구요. 실제로 그녀가 만난 멋진 왕자는 알면 알수록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역시도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가 싫어하는 공주의 어떤 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좌절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모든 면이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단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보단 단점들을 감추고, 잘 포장된 자신을 내보이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감추어진다고 잘 감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단점이라고 부정적으로 명명되는 순간 그런 인간적인 결함들에 감정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싫어하고 드러나질 않길 바라니 당혹스러움, 부끄러움, 분노 같은 감정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인간이라는 게 어떤 상황에서 참 비합리적인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많을 텐데, 그런 걸 막고 통제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감정들도 스스로 이름을 잊어 버려 내가 느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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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 作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화를 참지 못하고 아들을 때려죽인 왕. 억압된 정서는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옵니다.
정서의 억압은 한 쪽을 극단적으로 만들고, 다른 한 쪽을 수동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빅토리아는, 갑자기 문을 열고 튀어나온 비키가 왕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울부짖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슬프고 화가 날 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감정에 그냥 끄달려 가면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전처럼 비키를 옷장 안으로 밀어 넣고 통제하면 되는 건지. 슬픔과 분노는 자꾸 밀려와 내 키를 넘을 만큼 찰랑거리는데 정작 이것들을 만들어 내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그것만 모르나요~ 자신이 결점투성이 인간이라고 오랫동안 믿고 있다 보니 자신이 내리는 어떤 결정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뭘 해도 자기가 하고 있는 결정은 다 잘못된 결정 같고,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은 자신만큼이나 결함으로 가득 채워졌다는 생각이 들지요. 빅토리아도 비키를 옷장으로 밀어 넣으면서 나중에 이런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실 세상 모두가 비키의 존재를 부정하고 비키 없는 완벽한 빅토리아가 되라고 말할 뿐, 네 안의 비키도 소중하게 여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뻔한 내용, 뻔한 줄거리군 하시겠지만, 저 이 책 읽고 감동받았습니다. 네 안의 비키와도 친구로 지내라고 하는 책들은 많이 없으니까요. 네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 가둔다고 해서 그것들이 가둬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로 말해 주는 책도 만나보질 못했으니까요. 저에게 이제까지 독서란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 혹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는데, 이 책을 만난 이후로 독서에 마음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책 속의 부엉이 박사는 감정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빅토리아에게 그 속에서 수영하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무시하거나, 그 속에 빅토리아처럼 울기만 했던 저는 부엉이 박사 덕에 감정과 더불어 살기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의존하지 말고 오직 자신만의 수영법을 배워야 한다는 돌고래의 가르침은 저에게 냉정하지만 큰 위안이 됐던 납니다. 어쩌면 비키를 버린 빅토리아처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여전히 생각하며 오늘 글 마칩니다.

by 없음 | 2008/09/23 13:00 | 이언니를만나다 | 트랙백 | 덧글(0)

폭력의 구조-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누구의 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화를 소개한 책이었습니다. 순정만화부터 시작해서 한국 만화의 계보학을 그렸던 책이었죠. 뭐, 그 책에 관해서 별로 할 말 없구요. 그 책 안에서 소개했던 만화들 중 저에게 굉장히 기억에 남았던 만화 하나가 있었습니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던 하지오 모토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한때 여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던다던 꽃미남 야오이물이란 이야기에 심봉사 눈 뜨듯 눈이 번쩍! 호기심에 넘쳐 나던 그 시절, 좁은 제주도 땅에서 구해 보려고 애썼으나 전혀 발견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잊고 있었습니다.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中에서 그레그와 제레미


작년 겨울 쯤, 회사 근처에 만화를 파는 가게가 있다는 걸, 마케팅 팀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 손때 탄 만화는 이제 그만, 돈도 벌고 있으니 만화를 직접 사 보자고 생각하던 저에게 그 만화가게는 보물가게와 마찬가지였죠. 괜찮은 애장판만 사서 모으겠다고 갔었을 때, 저의 그 어린시절 ‘야오이’란 말에 손가락 떨게 만들었던 그 만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가 깔끔한 상태로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온갖 야한 장면을 상상하며 과다한 침 분비를 주체하고 있지 못할 때, 막상 읽기 시작하니 그 만화는 야오이는커녕, 에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한 인간의 정신이 성폭력으로 어떻게 몰락하는지, 가정 폭력은 어떤 배치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런 경험들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가 감정이라는 살을 더해서 그런지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아, 저는 전에 학교에서 피임 강좌를 준비하면서 온갖 경험담과 사례들을 읽어야 했었답니다)

제레미는 아름다운 엄마와 살고 있는 밝고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영국의 거부 그레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딱히 그레그를 맘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행복해 했기에 제레미도 행복했죠. 약혼한 후, 그레그는 제레미를 따로 만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제레미는 아~ 새 아버지가 나랑 친해지려고 하는구나 하며 만나러 가죠. 그러나 새 아버지 그레그는 제레미의 선한 의도를 이용해 제레미를 성폭행하려고 합니다. 제레미가 거부하자 그레그는 제레미 엄마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엄마는 자살 기도를 합니다.(바보 멍충이) 엄마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제레미는 결국 그레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엄마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폭행은 끊임없이 일어나죠. 제레미가 자신의 요구에 잘 응해 주지 않으면 가끔 제레미의 엄마도 때리면서 말이죠~)

전 이 제레미 가족 안에서의 폭력이 이루어지는 구조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만화였지만 현실과 똑같았으니까요. 만화가가 자료를 조사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면 명민한 통찰력이 있어서 직관적으로 안 것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만화는 가정폭력이 성립할 수 있는 핵심 조건들을 면밀하게 포착합니다. 

그레그가 맨 처음 사용하는 방법은 협박입니다. 제레미에게 너 내 말 듣지 않으면 너네 엄마부터 괴롭히겠다고 하죠. 아마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일 겁니다.

두번째로 그레그는 자신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막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정작 피해자인 제레미에게 협박의 방법을 사용했다면, 그 피해를 발견한 사람들에겐 침묵을 강요하죠. 나타샤가 제레미가 당하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라라고 말을 하자, 그 사실을 알리면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를 박탈해 버리겠다고 합니다. 막내 아들이 제레미가 당하고 있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자 한번 더 이야기하면 때리겠다고 말하지요. 제레미의 피해를 직접 목격한 하녀에겐 해고하는 것은 물론이오, 죽이기까지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침묵합니다. 우리는 이렇게까진 안 하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는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나타샤처럼 그레그의 폭력 체계에 공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뭐 이런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실은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세번째로 폭력 체계가 공고하게 만들어지기 위해선 무지無知가 자신의 무기인냥 하는 인물이 더 필요하죠. 이 만화에서 폭력적인 체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인물은 말하려고 하다가 그레그의 권력에 눌린 나타샤나 하녀가 아니라, 제레미의 엄마, 산드라입니다. 제레미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위해 그레그의 폭력을 견뎠죠. 그레그는 제레미를 자신의 통제 안에 두기 위해 산드라를 때리겠다는 둥, 산드라에게 네가 나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겠다는 둥 온갖 협박을 하죠. 그래서 제레미는 산드라가 저번처럼 자살 기도를 하지 않을까 하고 입을 꼭 다물고 몸으로 그의 폭력을 견뎌 냅니다. 하지만 나중에 산드라가 죽고 난 후에 제레미는 알게 되죠. 사실은 엄마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오히려 제레미가 견디지 못하고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깨어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는 걸, 엄마의 일기장을 읽으며 알게 됩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作 「유디트」
자신을 능욕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그레그에게 둘러싸인 첫번째 그림과 대조적입니다.


앞의 세 인물의 나름 적극적으로 폭력 체계를 유지하게 하는 인물이라면, 그 체계 자체를 수동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레미의 피해 사실을 듣게 될까 봐 제레미와 직접적인 대면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레그가 무서워 피해 다니기만 할 뿐, 제레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죠. 그레그가 제레미를 괴롭히기만 했다면, 모든 것은 금방 탄로났을 겁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침묵하고, 혹은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 폭력 행위를 돕는 사람들이 없다면, 이런 체계가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또한 제레미도 7권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그 폭력의 상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례들은 쓰면서도 힘들고, 읽으면서도 괴로우니 굳이 따로 이야기를 하진 않겠습니다.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 』와 함께 읽는다면 더 재밌는 경험이 될 거라고 감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by 없음 | 2008/09/23 12:55 | 이언니를만나다 이전 글들 | 트랙백 | 덧글(0)

여자의 동료는 여자라니깐뇨

누군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전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한두 해 영화 본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 잡지들을 읽으며 동네 비디오 가게의 사랑받는 고객으로 살아왔었고, 저희 부모님 같은 경우는 아직도 네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건 중․고등학교 때 영화랑 책만 봤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계신데요 뭐~. 근 3년간 어떤 영화가 좋았냐고 물으면 답이 달라지죠. 전 당당하게 「신 시티」(Sin City)만한 영화가 없다고 말합니다.

「신 시티」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나름 페미니스트의 향기를 풍기는 네가 어떻게 그런 초! 마초 영화를 좋아하냐고 대놓고 물어보진 않지만, 제 대답을 듣고 살짝 의아하게 여기는 분위기, 많이 느낍니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들과 폭력과 피로 얼룩진 ‘신 시티’에서 살아남으려는 등장 인물들. 게다가 거기서 여성들은 성노동을 하거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죽고 마는 보호 감찰관 이죠. 뭐 맞는 지적입니다.

로버트 로드리게스 作「신 시티」, 「플래닛 테러」


또 요새 본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뭐냐라고 다시 물으신다면, 전 다시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Planet Terror)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또 마초 영화 아니냐고 반문하실 겁니다. 첫 장면부터 카메라는 마치 여성의 몸을 만지는 것처럼 찍어가는데,(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첫 장면에 체리가 춤을 추는 부분은 정말 눈으로 몸을 만진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게 해주죠)그런 영화를 좋아하더니 너 정말 실망이야 요러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헐리우드의 다른 감독들과 비교해서 로드리게스는 그나마 자신이 찍는 마초 영화에서도 절대 여성들을 배제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전 감히 생각합니다.(게다가 요샌 그가 진화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슘따) 초반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신 시티」를 거쳐 「플래닛 테러」까지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점점 달라지고 있죠.

1) 성 노동은 죄가 아니다

한국에서 성 노동은 그냥 노동이 아닙니다. 온갖 사회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얽힌 노동이죠. 노동이면서도 노동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몸의 문제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동시에 투입되는 노동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기묘하게도 여성에게 있어선 사회적 타락(?)을 의미하는 노동이기도 하죠.

「신 시티」낸시(제시카 알바)와 「플래닛 테러」의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

「신 시티」와 「플래닛 테러」의 여성들은 대부분 성 노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종사하고 있지 않고 있더라도, 그 주변부에 있는 여성들이죠. 어떤 여성은 스트립걸로, 어떤 여성은 웨이트리스를, 어떤 여성은 의사이지만 자신의 남편에게 성 노동하는 여성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 영역 안에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영화들 속 여성들에겐 어떤 도덕적 잣대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낸시는 스트립걸로 살아갑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생계수단으로서 클럽의 스트립걸로 살아가죠. 영화 안에서 낸시에게 편하게 살려고 스트립쇼 한다라거나, 게을러서 저러고 산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에게 스트립쇼는 그저 일일 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지요.

올드 타운의 여성들은 어떻구요. 영화를 보다 보면 신 시티의 올드 타운은 그냥 만들어진 곳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신체를 착취하여 배를 불리는 포주와 약물 중독이 되게 만들어 그녀들을 그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갱들을 피해 그녀들 스스로가 만든 공간입니다. 경찰에게 얼마 정도의 돈을 내고, 대신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을 만든 겁니다. 영화를 보면 잘 알겠지만 그녀들은 그곳에 강제로 묶여 있거나, 한국 사회처럼 창문도 없는 곳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그 공간을 마치 직장처럼 생각하고 출퇴근(?)을 합니다. (영화 속에서 베키는 시간이 다 되었으니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조심히 집에 가라고 하죠)

2) 피해자임을 거부한다

신 시티 같은 곳에서 여성들이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이 일치해 있고, 마치 왕국처럼 한 집안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 시티의 골디와 플래닛 테러의 다코타는 모두 남성의 폭력에 노출돼 있는 여성들입니다. 골디는 교회 권력으로 진입하려다가 살해당하고, 다코타는 정신병자 같은 남편이 자신과 아이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며 살고 있죠.

영화「신 시티」중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폭력의 상황에서 피해자의 포지션을 취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의 영화에서 나오는 여성들은 그 포지션을 늘 벗어납니다.


그녀들은 이런 폭력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쌍둥이 동생 골디가 죽었는데도 웬디는 그녀를 죽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겠다고 나서죠. 다코타는 미친 남편을 피해 도망가겠다고 계획을 세웁니다. 사실 이런 폭력의 상황에서 우리는 보통 ‘피해자 다움’ 혹은 피해자가 취하는 포지션을 생각하죠. 얌전하게 있거나 혹은 삶의 의지를 꺾고 무기력하게 살거나. 어쩌면 권력은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폭력과 공포로 그녀들의 정체성을 피해자로 만들고,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폭력의 상황에선 어쩌면 피해자의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살기 위한 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죠. 들키면 남편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남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다코타. 동생을 위해 복수하다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복수를 실행하는 웬디. 이들이 성공하는지 못 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녀들에게 부여하는 위치를 과감하게 거부했다는 거죠

3) 여자의 동료는 여자!

흔히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하죠. 전 ‘남자의 적도 남자’라는 말로 대꾸해 주긴 합니다만,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 잘 사용되진 않죠. 이상하게 우리 사회 안에서는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이 유난히도 도드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연대는 아주 느슨하고 금방 깨지기 쉽다고 생각하죠.

전 로드리게스의 두 영화 안에서 여성들이 움직이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녀들은 결코 혼자 다니는 법이 없습니다. 신 시티에서 올드 타운은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의 공간이지만,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입니다. 그녀들이 룰을 만들고, 그녀들 스스로가 그 공간을 지배하죠. 실수로 경찰관을 죽여, 올드 타운이 어렵게 차지하고 있는 자치가 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때도 도망가거나 다른 편에 붙거나 그러지 않죠. 문제가 있으면 직접 해결합니다. 재키 보이의 시체도, 배신자도 그녀들이 직접 처리하죠.

「플래닛 테러」중에서
'여성의 적은 여성'?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저러한 통념을 깨는 예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저러한 통념이 왜 나왔을까 하는 점입니다.


올드 타운의 언니들은 저렇게 자신들의 자치 문제만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올드 타운의 구성원인 골디가 죽고, 그 언니인 웬디가 복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 그런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인데도, 올드 타운의 언니들은 함께 나섭니다. 올드 타운 안에서는 개인의 문제와 집단의 문제가 따로 존재하질 않습니다. 그녀들은 잘 알고 있죠. 포주와 갱들과 경찰이 자신들의 공간을 차지하고 그녀들을 착취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는 걸. 그래서 올드 타운의 연대가 깨어지기만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 언니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올드 타운은 여성들의 연대 때문이라는 이유로 아슬아슬한 게 아니라, 틈만 보이면 그녀들을 집어 삼키려는 외부 때문에 가벼울 수 있다는 걸요. 그런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이 언니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앞서 신 시티라는 도시 자체가 사용하는 공포와 폭력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마저도 함께 나누면서 어려움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올드 타운의 언니들은 자신들의 공간을 유지합니다. 어쩌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이 말. 사실은 공포와 폭력 없이도 유지되는 올드 타운 언니들의 연대를 시샘하기 위한 신 시티의 전략일지도 모르죠.  

by 없음 | 2008/09/23 12:52 | 이언니를만나다 이전 글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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